시 부주석 쪽이 나이는 어렸지만, 세상 물정에는 더 빨랐다. 그는 졸업 직후인 1979년 겅뱌오(耿 ) 국방부장의 비서로 들어갔다. 권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군(軍)을 첫 사회활동 무대로 택한 것이다. 2년 뒤에는 스스로 군복을 벗고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부서기로 내려갔다.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중앙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느니 정치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지방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1984년 중앙서기처 연구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보 서기에게 지방행(行)을 설득한 것도 시 부주석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성장 과정은 보 서기가 더 화려했다. 그는 다롄(大連) 시장을 지내면서 이 도시를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현대적 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중앙정부 상무부장을 지낼 때는 유럽과의 무역 마찰을 무난히 타결짓는 수완을 발휘했다. 서방의 정치가 못지않은 빼어난 말솜씨로 기자들을 몰고 다녔다. 이에 비해 푸젠(福建)성 성장, 저장(浙江)성·상하이시 서기 등을 거친 시 부주석은 “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위(無爲)’의 지도자였다. 스스로 일을 벌이기보다는 그 지방 특유의 질서에 몸을 맡겼고, 문제가 생겼을 때만 손을 댔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17차 공산당 대회가 열린 지난 2007년이었다. 중국 최고지도부는 재기 넘치는 보 서기가 아니라, 과묵한 시 부주석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선택했다. 보 서기는 부총리 자리를 노렸지만,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비토 세력의 반대 속에 서부인 충칭시의 서기로 밀려났다. 지난 5년여 동안 보 서기가 충칭에서 이룩한 업적은 눈이 부셨다. 보 서기의 브랜드가 된 ‘조직폭력배와 그 비호세력 척결’뿐만 아니라, 그가 역점을 두고 추진한 수십만 호의 임대주택 건설, 도농(都農) 통합 등도 고도성장의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는 중국 사회가 참고할 만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보 서기의 이런 업적은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한 채 ‘항명(抗命)’으로 해석됐다. ‘충칭 모델’이라는 말까지 작명(作名)해 요란하게 선전한 것이 “중앙정부도 못한 일을 내가 해냈다”는 웅변으로 비친 것이다. 문화대혁명기를 연상시키는 마오쩌둥(毛澤東) 찬양 운동은 자신이 ‘혁명가의 후손’임을 대놓고 자랑하는 태자당의 오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정치가로서 화려한 길을 걸어왔지만,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다. 신분과 재기, 능력을 모두 갖춘 보 서기에게도 중국공산당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