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 도령의 끈질긴 구애(求愛)를 받은 덕숭 낭자는 사랑을 허락하겠노라며 한가지 조건을 제시했지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덕 도령이 짓던 절은 완공 직전 불타버렸습니다. 마지막 순간 탐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짓기 시작한 절도 비슷한 시기에 소실(燒失)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령은 부처님만 생각하며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절이 지어지자 둘은 결혼했지만 낭자는 도령이 몸에 손대는 걸 한사코 꺼렸습니다. 젊은 도령은 육욕(肉慾)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도령은 싫다는 낭자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일며 낭자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린 도령의 손에는 낭자의 버선 한쪽만 남아있었습니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습니다. 이후 도령이 지은 절은 ‘수덕사(修德寺)’로, 뒷산은 ‘덕숭산(德崇山)’으로 불렸습니다.
중국 역사서인 ‘북사(北史)’ ‘수서(隨書)’ ‘주서(周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동진(東晋)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불교를 전한 뒤 승려와 절과 탑이 많아졌다.” 거기엔 절 이름도 나열돼 있지요. 흥륜사(興輪寺)-왕흥사(王興寺)-칠악사(漆岳寺)-사자사(師子寺)-미륵사(彌勒寺)-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인데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절은 수덕사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은 전설일 뿐이지만 기록상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이 재위했을 때 창건된 것으로 우리 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추정은 수덕사에서 백제기와가 발견됐기 때문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속고승전(續高僧傳)에도 고승 혜현(惠現)이 여기서 법화경(法華經)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역사 깊은 수덕사는 고승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가운데 근대 고승으로는 단연 경허(鏡虛·1846~1912)스님과 만공(滿空·1871~1946)스님이 꼽힙니다.

- 만공스님의 초상화다. 스님은 수덕사가 덕수총림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분에 힘입어 수덕사는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으로 꼽히며 1984년 총림(叢林)으로 승격되지요. 걸출한 선사(禪師)의 힘은 이렇듯 위대합니다.

-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보면 역사깊은 대웅전이 보인다.

- 수덕사 대웅전이다. 비오는 어느날 오후, 아버지가 마당에 아이를 목마태우고있다.

-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의 꼭대기다. 불교의 정화를 상징하듯 금빛이 찬란하다.
원래 수덕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선포하면서 조선의 사찰을 30본산제로 바꿀 때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절이 ‘근대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지종찰’로 위상을 드높였으니 수덕사의 경허-만공스님 자랑은 대단합니다.

- 수덕사의 범종을 들으며 숱한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수덕사에는 여러 보물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 바로 거문고입니다. 현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거문고는 원래 고려 공민왕이 만든 것입니다. 풍류를 즐긴 이 거문고는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지요.

- 공민왕이 신령스런 오동나무로 만들었다는 거문고다. 이 거문고는 만공스님에게 왔다가 지금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있다.
공민왕의 거문고는 고려말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에게 넘어갔다가 조선이 성립된 후 왕실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거문고는 조선이 망하기 직전까지 왕가에서 후대로 잘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 거문고의 ‘신상(身上)’에 변동이 생깁니다.
거문고는 고종의 둘째 왕자인 의친왕 이강(李堈)에게 전해졌는데 그게 만공스님에게 넘어간 사연은 만공스님이 운현궁으로 의친왕을 찾아가며 시작됩니다. 만공스님은 덕숭산 임야가 이왕직(李王職) 소유로 넘어간 것을 되돌리려 그곳을 찾았습니다. 첫 대면에서 만공스님은 일장 법문으로 의친왕을 감동시켰습니다.

- 수덕사 대웅전 바로 밑에 있는 만공기념관에는 만공스님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있다.
세 번의 절로 만공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불법에 귀의할 것을 다짐한 의친왕은 신표를 내리겠다고 합니다. 만공스님은 사찰 임야 문제를 꺼내 의친왕으로부터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받지요. 의친왕은 말했습니다. “절의 땅을 절로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하니 그것을 신표로 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공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정 그러시면 저 벽에 걸린 거문고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천 년 보물을 달라는 말에 의친왕은 놀라고 말지요.
잠시 망설이던 의친왕은 며칠 뒤 사람을 시켜 수덕사 만공스님에게 거문고를 보냅니다. 이때부터 수덕사 소림초당 앞 갱진교(更進橋)에서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끊어질 듯 이어지는 거문고 타는 소리가 때때로 울려 퍼졌습니다. 만공스님의 연주지요. 그렇다면 만공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그는 1871년 전북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선비인 송신통(宋神通), 어머니는 김씨로 어릴 적 이름은 바우였습니다. 바우가 두살 때 아버지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속세에 살면서 세속을 일할 아이같지가 않아…. 불문(佛門)에 들어 고승이 될 것 같아.”
이 말을 한지 9년 뒤 바우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납니다. 바우가 열세살 때 홀로된 어머니는 바우와 함께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갔습니다.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려 미륵부처를 찾아간 것입니다. 미륵은 아시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56억 7000만년 후 사바세계에 강림한다는 분입니다. 미륵불을 보는 순간 바우는 알 수 없는 기쁨에 들떠 소리를 지르며 부처님께 세 번 절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는 세상을 뜬 남편이 생전에 남긴 예언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후 바우는 어머니에게 언제 금산사에 다시 가느냐고 칭얼댔습니다.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바우는 말하지요.
“꿈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절 업어주셨기 때문이에요.”
결국 바우는 1년 뒤인 열네살 때 지게 하나를 달랑 지고 출가했습니다. 그가 승려가 된 과정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태인읍의 봉서사였는데 행자(行者) 생활을 하는 동안 온갖 잡일을 다해야 한다는 말에 놀라 줄행랑을 놓고 말지요. 봉서사를 나온 바우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전주 승주군 송광사였습니다. 거기서 바우는 노스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지요.
“같은 나무라도 목수를 잘만나야 큰집 대들보로 다듬어지는 법, 땔나무꾼을 만나면 장작밖에 안 돼 불에 타 없어지느니라.”
그는 노스님으로부터 ‘진암 노스님이 계시는 논산 쌍계사로 가보거라’라는 말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거지꼴이 되다시피 쌍계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진암 노스님이 계룡산 동학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지만 다시 동학사로 향합니다. 나흘 만에 동학사에 도착했을 때 바우는 마당에 앉아 풀을 뽑는 노스님을 보게 되지요. 그 노스님이 바로 진암스님이었는데 바우는 부모의 승낙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위기를 맞습니다. 그때 바우는 노스님께 당돌하게 대들었습니다.
“제가 진암 노스님을 만나뵙기 위해 몇백리 길을 걸어왔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바우를 받아들입니다. 1884년 5월 행자 생활을 시작한 바우는 행자로 불문에 들어간 지 다섯달만인 그해 10월 운명적인 만나지요. 진암을 뵙기 위해 찾아온 집채만 한 체구에 사자 갈기 같은 수염을 휘날리는 스님이 일주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가 바로 충청도 서산 천장암에서 수행하던 경허스님이었습니다. 진암은 경허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바우를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②편에 계속>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