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공스님의 스승인 경허스님이다. 이 사제의 관계는 상상할 수 없는 일화로 점철돼있다.
“저놈들 잡아요!”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두 스님을 쫓기 시작했지요. 두 스님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차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리고 두 사람은 산속에서 마주쳤습니다. 만공은 부아가 치밀었지요. 그때 경허스님이 껄걸 웃더니 묻는 것이었습니다. “너 죽으라고 도망칠 때도 바랑이 무겁더냐?” 만공이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무거운지 가벼운지 몰랐다”고 하자 경허스님은 말했습니다. “그것 봐다 무겁느니 괴롭느니 하는 게 다 마음의 장난이니라.”
만공이 견성(見性)했을 때 둘이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경허가 묻습니다. “생과 사는 어떠한고?” 만공이 답합니다. “다들 도를 깨달으면 살고 죽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제가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며 혹은 살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합니다.” 다시 경허가 묻습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던고?” 만공이 말합니다. “얻은 것도 없거니와 잃은 것도 없사옵니다.” 이때 ‘딱’ ‘딱’ ‘딱’하고 죽비 세 번 내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경허스님은 제자에게 더 이상 물을 게 없었지요.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雲月溪山處處同)
수산선자의 대가풍이여(叟山禪子大家風)
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慇懃分付無文印)
한 조각 권세 기틀 안중에 살았구나(一段機權活眼中)
이렇게 제자의 성장을 목도한 경허스님은 천장암을 만공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납니다. 산에 사자가 두 마리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가 남긴 말은 “잘 있거라, 난 이만 갈란다”였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역류하려 용쓰는 일반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요. 먼 훗날 경허스님은 함경도 삼수갑산의 웅이방(熊耳方)이라는 곳에서 열반에 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스승이 숨졌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간 만공스님은 경허스님이 승려도 아닌 행색으로 유랑하며 시를 읊조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숨진 걸 알게 됩니다. 삼수갑산에서 경허스님은 박난주(朴蘭舟)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만공스님은 스승에게 이런 게송(偈頌)을 바칩니다.

- 수덕사 선미술관 앞에는 고뇌하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진 작품이 있다.
‘착하기는 부처님보다 더했고 사납기는 호랑이보다 더했던 분, 경허선사여! 천화하여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 술에 취해 꽃 속에 계십니까.’
수덕사에선 경허-만공스님의 관계 못지않게 만공스님과 김일엽스님의 관계도 유명합니다. 김일엽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1896년 태어나 1971년 숨진 김일엽은 평남 용강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주(元周)였습니다. 아버지는 김용경 목사였지는데 5대 독자로 결혼한 지 6년 만에 얻은 첫 자식이 김일엽이었습니다. 어머니 이말대는 17세 때 집안의 강요로 초혼에 상처한 22세 홀아비 김용겸과 억지 결혼했지요. 김일엽은 네 동생을 뒀지만 모두 요절했습니다.
개화(開化)된 아버지 덕에 어렸을 적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운 김일엽은 아홉살 때 구세소학교(救世小學校)에 입학했으며 1906년 삼숭보통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의 친구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 ‘사(死)의 찬미’로 유명한 가수 윤심덕이었습니다. 김일엽의 어머니는 그녀가 9살 때 숨졌습니다. 아버지는 계모 한은총과 결혼했는데 어머니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야당의 대표인사가 된 정일형(鄭一亨)입니다. 그의 아들은 정대철, 정일형의 아내가 한국 최초의 변호사 이태영 여사였습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잇달아 동생들을 저 세상을 떠나보낸 김일엽은 훗날 이런 회고를 남겼습니다.

- 만공스님이 한때 수도했던 서산 간월암이다.
“불행히 불공평한 운명의 손에 번롱을 받아 파란 많고 곡절 많은 생활에 슬픔과 눈물로 지내든 처녀 시대를 면하고 새 가정을 지내게 된 지 어느덧 새 겨울을 맞게 되었나이다. 파란 많던 처녀 시대에 비하여 지금의 새 생활은 실로 안온하고 따뜻한 것이외다. 그러나 꽃 웃는 아침, 달 돋는 저녁에 마루 위에 고요히 앉아 불귀의 객 되신 양친을 애모하는 회포로 기꺼운 현재를 깨뜨리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없나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평양성 내 공동묘지에 모시었으니까 물론 교육들의 돌봄이 있을 것이고 더구나 전 조선인의 대표적 독신자로 모든 신자의 선앙과 존경을 받으셨으니까 염려가 적지만은 어머니는 외딴 우리 본촌에 벌판을 내려보는 한적한 산 위에 외로이 묻히셨나이다.”
사별과 이별의 상흔을 가슴 깊이 담았던 김일엽은 용강에서 만난 친구 윤심덕, 교육인 박인덕과 교유했으며 훗날 나혜석과도 절친한 사이가 됩니다. 1912년 삼숭학교를 마친 그는 같은 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진학했다가 1913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지요. 이화학당에서 문학동아리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던 김일엽은 재학시절 한 부자 집 아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파혼당하고 맙니다. 그때 이 부자 집 아들은 그녀에게 위로금조로 집 한 채와 많은 땅을 줬습니다. 김일엽은 이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 간월암에서 바라본 낙조다. 화엄세계가 이처럼 장엄할 것이다.
“(비록 많은 돈을 갖게 됐지만) 내 창자를 위로할 만한 음식과 한서(寒暑)를 피할 만한 옷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는 1914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마치고 이화학당 대학 예과로 진학해 1918년 3월 졸업한 뒤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사과정을 수료합니다. 그리곤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가 닛신여학교에서 몇달 공부한 뒤 귀국해 그해 여름 정동교회에서 연희전문학교 화학교사 이노익과 결혼합니다. 당시 40세였던 이노익은 미국 웨슬리언대학를 졸업했지만 다리가 하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18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혼남 이노익과의 결혼을 김일엽의 친구들은 말렸습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결혼을 강행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회고록에 임장화-백성욱 같은 남자이름은 등장하지만 첫 남편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니까요. 후일담이지만 김일엽은 결혼할 때만 해도 이노익이 총각인 줄로만 알았고 의족을 한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고 하지요. 이노익의 첫 배우자가 거기 놀라 첫날밤 도망쳤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친구를 통해 들었으니 그 충격이 상당히 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③편에 계속>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