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독일 동북부 라이프치히 시내 그라씨 민속박물관에서 ‘한국의 재발견’이란 전시회가 개막됐다. 독일 내 10개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중 빼어난 것을 골라서 선보이는 순회전의 하나다. 거기서 뜻밖에 묄렌도르프라는 이름을 만났다. 꼭 130년 전 조선왕국에 ‘세계화’와 ‘근대’를 가르치기 위해 초빙됐던 최초의 서양 사람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1847~1901), 한국 이름이 목인덕(穆麟德)으로 알려진 그 사람이다.
옥(玉)으로 만든 필통과 보석함, 비녀, 약통, 형형색색의 편지지, 은(銀)으로 화려하게 무늬를 새겨넣은 자물쇠…. 전시회에는 고려청자 불상 등과 함께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수집했거나 사용했던 물건 수십 점이 진열돼 있었다. 라이프치히가 동독(東獨)에 속해있던 시절엔 수장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독일 통일 후 한국과 교류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라이프치히 옆 할레에서 대학을 졸업한 묄렌도르프는 1882년 서울에 왔다. 조선이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이후 많은 나라가 수교(修交)를 요청해 왔지만 당시 조선에는 조약문을 쓸 줄 아는 사람도, 외무부도, 세관도 없었다. 조선의 선비들을 대신해 이 일을 해준 사람이 고종 임금이 고용한 묄렌도르프였다. 묄렌도르프는 “우리가 오자 40만 서울 시민이 ‘신기한 동물’인 우리를 보려고 다 나온 것 같았다”고 했다. 묄렌도르프는 이런 나라에 최초의 외국어학교도 세우고 조폐공사도 세웠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화가 발달한 도시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묄렌도르프는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국제인이었다. 그가 조선에 와서 개인적인 야심을 채우려 했다는 비난도 있지만 그 시절 자신의 입신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 멀리 극동의 오지에 제 발로 올 사람이 있었을까. 문제는 그의 야심을 밑천 삼아서 조선의 갈 길을 개척해야 했던 당시 위정자들의 지혜와 경륜일 것이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3년 만에 조선을 떠나야 했다. 조선을 놓고 먹이다툼을 하던 일본·영국·중국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고 이런 외세에 휘둘리기만 하는 조선 왕실이 등을 돌렸다. 위정자들은 수구와 개방으로 갈려서 싸웠지만 그 싸움은 실상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떠나며 이렇게 썼다. “왕이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왕은 이제부터는 아무한테나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공무에 관한 보고는 담당 대신으로부터만 듣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임명도 각의에서 승인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묄렌도르프는 자신이 서울에서 보낸 수집품들이 100년이 넘어 라이프치히에서 이처럼 성대한 전시에 초대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제 힘으로 근대화를 하는 데 실패한 조선은 격랑과 오욕의 시절을 겪다가 끝내 일본의 속국(屬國)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전쟁을 거쳐 분단의 악조건 속에서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나라로 자라났다. 역사는 시대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매섭게 후려치며 시련을 주기도 하고, 기회를 잘 포착하면 등을 두드려주기도 하면서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는 모양이다. 라이프치히의 묄렌도르프 기증 유물들은 이런 역사의 섭리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묄렌도르프가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어떻게 읽고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것이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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