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王 박태준 별세] 박태준 정신 “난 社長 아닌 소대장…

전쟁터엔 인격 없다”

  • 전수용 기자

 입력 : 2011.12.14 03:00

 

[군인 정신과 기업가의 魂]
소대장論 – 80% 공정 완료된 구조물, 콘크리트 10㎝ 미달로 폭파
오케스트라論 – 손에는 늘 軍 지휘봉… 수천명 종업원 하모니 조율
목욕論 – 깨끗한 몸에서 깨끗한 鐵 나와… 제철소 목욕탕, 특급호텔 수준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1978년 직원을 대상으로 한 박태준 명예회장의 특강)

박 회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으로 살았던 그는 군인정신과 기업가의 혼(魂)을 함께 가진 철강왕이었다.

군인정신이 바탕이 된 완벽주의자

1977년 8월 1일 발전 설비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 회장은 콘크리트가 10cm 정도 덜 쳐진 곳을 발견했다. 이튿날 건설 현장의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임직원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80%의 공정이 진행된 구조물을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손실은 봤지만 ‘포철(현 포스코)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무형의 자산으로 남았다. 또 하버드대 등의 경영학 교재에 모범 경영 관리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 회장은 현장에서 늘 “나는 사장이 아니라 전쟁터 소대장이다. 전쟁터 소대장에겐 인격이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 건설업 수준에서 지휘자가 고매한 인격에 매달린다면 자신의 인격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 대업을 망칠 것이라는 얘기다.

1971년 4월 포스코의 사보 ‘쇳물’을 창간할 때 박 회장은 육필로 휘호를 썼다. ‘무엇이든 첫째가 됩시다.’

박 회장 손에는 늘 군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지휘자의 지휘로 악기가 혼연일체가 될 때 아름다운 곡이 나오는 것처럼 박 회장은 포스코 경영을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그는 “모든 기계가 고유 기능을 가진 것처럼 수천 명의 종업원 개개인은 특성이 있다”며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기계를 효과적으로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가난 없애려 철에 목숨 건 기업가

박 회장이 ‘공장 관리 원칙 1호’라고 강조했던 것이 바로 ‘목욕론(沐浴論)’이다. 그는 “목욕을 잘해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정돈하는 습성이 생겨 안전의식이 높아지고, 제품 관리도 잘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원 기숙사를 찾을 때면 늘 목욕탕을 먼저 가볼 정도로 목욕을 강조했다. 1985~1987년 제철소 내 목욕탕·화장실 개·보수 때는 50억원을 들여 서울 특급 호텔 수준으로 바꿔 놓기도 했다.

1970년 가을 박 회장은 보험회사로부터 6000만원의 거금을 리베이트로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내밀었지만 박 대통령은 알아서 쓰라고 했다. 박 회장은 이 돈으로 장학재단을 세웠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 회장은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대는 일본업체 물건을 쓰라”는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요구를 다섯 차례나 거절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뻣뻣한 박 회장에게 ‘소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훈장으로 여겼다.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던 박 회장은 1974년 가을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이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장롱 속에는 이불과 옷, 금고 속에는 집 문서와 패물 몇 가지가 전부였다.

포스텍을 세운 박 회장은 교수직 인사 청탁에 시달렸다. 박 회장은 아무런 말없이 이력서를 당시 김호길 총장에게 넘겼지만 곧 반려됐다. 기분이 좋아진 박 회장은 이후로 인사 청탁을 받으면 “우리 총장은 내 말도 안 듣는 사람이오. 학교로 이력서를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입력 : 2011.12.14 02:23

 

박태준의 뜨거운 인생
일본서 어린 시절 – 와세다공대 들어갔다 귀국
6·25 참전해 죽을 고비… 전쟁 뒤 육군대학 수석 졸업
포항제철 건설 – “난 고속도로 감독할 거야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
박정희 ‘종이마패’ 건네

 

 

1971년 8월 일본 도쿄. 4월 시작한 포항제철소 공장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본 미쓰비시의 설비 담당자는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며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태준은 “하루 무조건 700㎥ 이상 콘크리트를 타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하루 3시간씩만 눈을 붙이고 쉴 새 없이 현장을 독려했다. 박태준의 철강 신화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는 1970년 4월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첫 쇳물을 뽑아냈고 25년 재임하는 동안 포스코를 조강 생산 2100만t급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와세다 공대 입학… 6·25 참전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와세다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 이후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갔다. 6·25전쟁 때에는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박태준은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았다. 1950년 6월 27일 박 회장은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아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 순간을 각오했지만 이때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에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박태준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친척 어른 소개로 부인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녀는 신혼 휴가 뒤 서울로 떠나는 남편에게 첫 선물을 건넸다. 자기 은사인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 그것이 박태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만난 것이었다.

 

 

 

 

 

 

 

[철강王 박태준 별세] 철강 인생에 하나의 오점… 정치 입문

  • 조백건 기자 

     

    입력 : 2011.12.14 03:09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81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육사 후배이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훗날 평전 등을 통해 “포항제철을 외풍(外風)에서 지킬 방패막이가 필요해 정치권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국회 재무위원장을 맡았고, 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정계 입문 10년 만인 1990년 1월 민정당의 대표로 추대됐다. 하지만 민정당이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과 3당합당을 하는 바람에 보름여 만에 최고위원으로 ‘강등’됐다.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해 4월 노태우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에게 당내 경선에 참여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그는 결국 대선 불출마를 택했다. 그는 대신 내각제를 대통령 공약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면서 YS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박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거절했고, 그해 10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포항제철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이후 출국해 미국일본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1997년 박 명예회장은 4년여의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는 그해 7월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승리하면서 4선(選)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던 그해 11월 자민련에 입당해 ‘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참여해 DJ의 당선을 도왔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반도체와 자동차 등에서 대기업 간 사업 중복을 없앤다는 취지로 5대 그룹의 빅딜(사업 교환)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다. 그러나 곧바로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취임 4개월 만에 낙마했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정치와 절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