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박사(1875~1965)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5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양녕대군의 16대손이요 6대독자로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서울로 이사해서 지금의 서울역 근처인 雩守峴 남쪽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후일 호를 雩南이라고 했습니다.

열아홉 살까지 한문수학을 했고 수무 살에 培材學堂에 들어가서 아펜젤러와 徐載弼박사를 만나서 기독교와 개화사상을 접했고 協成會를 통해서 문필활동을 했으며 3년 뒤의 졸업식에서는 600명의 청중 앞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조선의 독립’을 역설한 영어연설로 참석한 여러 대신들과 외교사절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배재학당을 나와서는 獨立協會가 주최하는 萬民共同會에서 가두연설로 열강들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고 한국최초의 일간지 每日新聞을 창간(1898.1.26)하여 사장 겸 저술인으로서 국민계몽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1899년 1월에 발생한 朴泳孝일파의 ‘고종황제 廢位陰謀說’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옥중에서도 근대 역사관, 정치관 및 시대상황을 분석한 <獨立精神>과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을 파헤친 <淸日戰記>를 집필하여 후일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 (맨 왼쪽)

閔泳煥선생의 주선으로 특사되어 고종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선교사의 협력으로 미국 국무장관을 통하여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나기는 했으나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후에 美 日 간에 맺은 ‘태프트-가스라 밀약’(1905.7.29)의 진실을 알고부터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루스벨트대통령을 만나려는 정장차림의 이승만 김규식박사와 함께

그래서 그는 밀사활동을 단념하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1910년까지 5년 사이에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하버드대학만 최고인줄 알지만 프린스턴대학도 하버드대학과 랭킹 1. 2위를 다투는 명문입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永世中立論’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논문은 우수논문으로 평가되어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되고 동대학도서관에 영구보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프린스턴대학의 총장은 후일 미국의 28대대통령이요 民族自決主義 제장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드로 윌슨이었습니다. 당시 이박사는 윌슨총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 가족과도 친밀한 사이가 되어 후일 독립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100년 전인 1910년에 미국의 명문대학들을 두루 거처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박사는 참으로 암흑 속에 비치는 한줄기 불빛이었습니다. 兪吉浚, 徐載弼선생이 미국유학은 먼저지만 유길준선생은 정규과정을 마치지 못했고 서재필선생도 대학은 먼저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 후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세계적인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마도 이승만박사가 처음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박사는 졸업의 기쁨을 맛보지도 못한 채 빼앗긴 조국을 위해서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외국선교사의 비호를 받으며 YMCA운동을 통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가 조작한 ‘105人事件’에 연루되어 체포위기에 몰리자 귀국활동 1년여 만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할 수박에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 한성감옥옥중동지였던 독립투사 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정착하여 韓人會를 이끌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이미 미국대통령이 돼 있는 은사 우드로 윌슨을 비롯한 미국의 정계, 언론계, 종교계인사들을 만나는 등 독립외교를 펼치는 과정에서 박용만동지와 갈등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노선갈등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세 개의 독립운동노선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安昌浩선생으로 대표되는 民族敎育路線이고 또 하나는 박용만의 武力鬪爭路線이며 또 다른 하나가 이승만의 國際外交路線이었습니다. 민족교육, 무력투쟁 모두 좋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고 저 완악한 일본을 누르고 독립을 쟁취하려면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열강의 힘을 빌리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그러한 노선갈등은 미국에서 뿐 아니라 해내외의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의 갈등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갈등은 재미동포들로부터 제공되는 독립자금의 사용문제였습니다. 이박사가 너무 돈을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 뿐 아니라 독립운동기간 내내, 아니 오늘까지도 이박사를 비판하는 분들의 시각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이 풍찬노숙을 면치 못했는데 이박사는 항상 정장을 갖춰 입고 일류호텔에 투숙하는 등 호의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제외교를 펼치려면 복장부터 단정했어야 했을 것이고 무명청년이 고위인사를 면담하려면 장소라도 번듯한 곳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돈 문제 이전에도 이박사를 곤혹스럽게 하는, 재미한인사회가 모두 이박사를 규탄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908년 미국에서 親日미국인 스티븐슨을 한국의 청년이 저격했습니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에 가담한 田明雲, 張仁煥 두 의사가 미국법정에 섰습니다.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던 이승만에게 변호를 의뢰했는데 그가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한인사회가 발칵 했습니다.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편에 서서 한국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자를 우리의 애국지사가 저격하다가 법정에 섰는데 독립운동을 지향하는 한국최고의 지성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박사를 비판하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박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우호관계에 있었고 스티븐슨은 미국을 위하여 일하는 외교관이었습니다. 살인을 용납하지 않는 기독교국가인 미국사회 역시 발칵 뒤집혔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애국지사지만 그들에게는 자국의 외교관을 저격한 테러리스트일 뿐입니다. 그런 마당에 장차 외교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굳은 의지를 품은 이박사가 어떻게 변호에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저러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이승만박사의 인격과 활동은 국내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증거가 1919년 3.1운동이후에 도처에서 속출한 임시정부의 조직입니다. 10여 개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 중에 뚜렷한 존재가 셋이었습니다. 그 하나가 1919년 3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露領臨時政府입니다. 여기에서 추대된 인물이 대통령 孫秉熙 국무총리 李承晩이었습니다.

그 다음 같은 해 4월 11일에 上海臨時政府가 수립되었고 처음엔 의원내각제로 출발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없고 내각수반인 국무총리가 李承晩이었습니다. 그보다 열흘쯤 뒤인 4월 23일에 서울에서 漢城臨時政府가 탄생했는데 執政官總裁 李承晩, 국무총리 李東輝였습니다. 3개 정부가 모두 이박사를 리더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분파도 있고 갈등도 있었지만 이 민족을 이끌어나갈 인물은 역시 李承晩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세계열강의 지도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는 40대 초반의 당당한 국제신사, 그는 역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1개월쯤 뒤에 추대소식을 접한 이박사는 서울이나 상해로 부임하는 것보다 국제연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자격으로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우선 미국에 임시정부 歐美委員會와 公使館을 설치하고 세계 각국에 독립을 선포했으며 임정 각 기관에 훈령을 보내는 등 활기찬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난립했던 임시정부의 통합논의가 이뤄져서 같은 해 9월 6일에 3개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고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고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추대되었습니다. 44세의 임정대통령 이승만은 그 후로도 1년여를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우선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열강들의 승인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韓國獨立承認案을 미 의회에 상정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미 上院에서 34 : 46으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임정승인실패에 실망한 이박사는 상해의 누차 부임독촉에도 불구하고 미뤄왔던 상해행을 결심하고 중국화물선에 중국인시신으로 위장하여 관 속에 숨어서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일제가 30만 불의 현상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1921년 1월 1일 상해임시정부 시무식 구미위원부 간부들

그토록 어렵게 부임한 대통령직이었지만 여상했던대로 직무수행은 쉽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독립운동수단의 선택을 놓고 벌어지는 노선갈등과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등의 이념갈등으로 독립운동의 효율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5개월 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미국에서 大統領職銜을 가지고 외교노선을 고수하면서 歐美委員部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왔는데 상해에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5년씩이나 자리를 비우고 미국에서 대통령행세만 한다고 탄핵을 해서 대통령직을 면직시키고 구미위원부는 폐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박사는 이에 불복하고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상해에서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후에 상해에서 구미위원부를 다시 인정했고, 그 후 臨時政府歐美委員部委員長 자격으로 활동 중이던 1933년에는 제네바의 국제연맹 全權大使로 임명되었습니다.

국제연맹에서 세계열강에 한국의 독립지원을 호소하고 ‘극동분쟁과 한국’ 이라는 주제로 방송연설을 하여 크게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럽각국의 신문에 한국독립운동기사가 보도 되었습니다. 국제무대의 각광을 받은 58세의 노신사는 여기에서 프란체스카여사를 만나 미국으로 동행했고 다음해에 결혼했습니다.

1934년 결혼한 이박사부부 이박사의 저서 ‘일본내막기’

1941년 6월에는 <日本內幕記>라는 책을 써서 일본이 장차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미국의 조야는 일본이 감히 미국을 공격하랴 고 냉소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후인 그해 10월에 진주만이 기습을 받자 깜짝 놀라 이박사를 다시 보게 되었고 책은 베스트셀라가 되었습니다.

이박사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임정승인을 재요청하고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한반도는 장차 소련에 의하여 공산화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명의로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대한독립군의 게릴라전 전개를 위한 무기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 담음해인 1942년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전략의 일환으로 개국한 단파방송‘미국의 소리’를 통하여 육성방송(6월 13일)을 함으로서 해내외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그 후에는 또 미국이 한국독립지지를 약속하는 의미로 태극마크가 들어 있는 5센트짜리 우표를 미국체신청에서 공식 발행케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독립지원약속의 상징으로 태극기를 넣어 발행항 미국우표

1943년 11월 17일 카이로선언에서 당시 세계 50여 식민지국가 중에서 유독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항이 들어간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총 7개 항목 중 제6항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초안은 루스벨트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홉킨스가 작성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식민지국가들의 독립이 제2차세계대전 후에 국제연합에 의해서 절로 얻어진 걸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1954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는 1957년에, 포르트갈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는 최근인 2002년에 겨우 독립을 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도 독립을 못한 나라들이 많아서 1960년에 UN이 ‘식민지국가독립부여선언’을 하게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조기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립지사 여러분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美 英 中이 이렇게 한국독립을 보장하면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압박할 것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한반도는 전쟁으로 탈취한 영토가 아니고 쌍방합의에 의해서 적법하게 합병된 것임을 내세우면서 이를 일축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이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한 미영연합국은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려 했습니다.

1945년 2월 11일 美 英 蘇가 회동한 얄타회담에서 러일전쟁 시에 일본에 빼앗긴 러시아영토를 회복시켜주는 조건으로 소련의 참전이 결정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소련의 참전이 한국독립에 걸림돌이 될 것임을 예견했던 이박사는 이 회담에서 美英이 한반도까지 소련에 넘겨주기로 했다는 ‘韓半島密約說’을 폭로하여 미 국무부와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5개월 후인 7월 26일 미 영 소가 전일의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을 했지만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10일 후인 8월 6일에 원폭을 투하했고 교활한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참전을 약속해 놓고도 미루어오기만 하다가 원폭투하를 보고나서 그 이틀 후인 8월 8일에 비로소 참전을 했습니다.

원폭을 투하하자 일본은 1주일 후에 바로 항복을 했고 소련은 참전 후 15일 만에 평양에 입성하는 불로소득을 했습니다. 이박사가 예견했던 대로 소련을 불필요하게 끌어드린 것이 한국의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는 소련을 경계해온 이박사의 경고를 美英이 수용하지 않은데서 기인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전 후 소련과 협력하여 한국독립약속을 이행하려던 미국은 반소주의로 일관해 온 이박사가 달갑지 않았습니다. 2개월이 지난 10월에야 귀국을 허용했고 귀국 후에도 점령군사령관인 하지와 많은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박사는 귀국하자마자 獨立促成中央協議會 總裁, 民主議院 議長을 역임했고 공상주의자들과 싸우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며 일부인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單獨政府樹立案을 발표하여 유엔의 승인을 얻어냄으로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취임선서하는 이승만대통령

이을 두고 국토분단을 초래했다느니, 정통성이 결여됐다느니, 국가체제를 폄하하려는 무리가 있음을 봅니다마는 그때 만일 일부인사의 주장대로 南北協商을 계속했더라면 자금 이 나라는 어찌 됐겠습니까? 이 땅에 대한민국을 세운 것은 이승만박사의 위대한 업적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와서 이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될 일이 또 있습니다. 6.25전쟁을 극복한 것과 전후 안전보장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그거야 미국이 도와줬으니까 됐다 고 합니다. 물론 미국이 도와줘서 됐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순순히 도와줬습니까? 그 이면에는 이박사의 탁견과 끈질긴 투쟁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1950년 1월 12일에 소위 ‘애치슨라인’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했습니다. 이박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소련이 밀고 내려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트루먼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박사는 6월 25일 한낮이 되어서야 그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박사는 직시 트루먼에게 전화를 걸게 했습니다. 미국시간은 이미 밤이고 트루먼은 자고 있어서 깨울 수 없다는 비서의 전갈이 돌아왔습니다. 이박사는 전화기를 뺏어들고 지금 공산군이 쳐 내려와서 이 땅에 와있는 너희나라국민이 다 죽고 하나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판인데 너희 대통령이 편안히 잠을 잔단 말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바꾼 트루먼에게 ‘스탈린에게 오판을 하게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긴급히 군대를 투입하지 않으면 중대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라고 일갈을 하고 장면대사에게 미국과 유엔이 신속히 대응토록 할 방안들을 긴급지시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파국을 면치 못 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업적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해 낸 것입니다. 국민들의 반전여론에 몰린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신속히 휴전을 성립시킬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휴전은 1951년 6월에 소련이 제안하고 영미가 호응했지만 당사자인 한국이 반대해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박사는 너희가 돌아가면 우리는 단독으로라도 싸우겠다고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전국방방곡곡에서 궐기대회를 열게 했습니다. 이걸 두고 이박사가 호전적이었다느니, 무모했다느니 말들 하지만 참말로 이박사가 단독북진하려고 그랬을까요? 단독북진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을까요?

아무런 대책 없이 미약한 우리군대만 놔두고 유엔군이 철수하면 언제라도 공산군이 다시 쳐 내려올 것이니 대책을 세우고 따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니 행동으로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공산군이 언제 다시 기습할지 모르니 미국이 헌법절차 없이, 국제연합과의 협의 없이 즉각 개입할 수 있는 방위조약을 맺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이박사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쉽게 응해오지 않았습니다. 이박사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미군이 관리하는 27,000명의 반공포로를 통고 없이 단독으로 석방(1953.6.18)해 버렸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놀랐습니다. 휴전을 공약하고 당선돼서 대통령에 취임한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휴전을 성립시키지 못해서 초초하던 판인데 설상가상으로 큰일이 터졌습니다.

이박사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는 요구를 다 들어주고 휴전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공포로를 석방한지 한 달이 좀 지나서 휴전은 성립(1953.7.27)되었고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한국군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줄 것과 전후복구를 원조해 줄 것까지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마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00년 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시기에 세계정세를 꿰뚫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정부를 수립한 정치가, 전쟁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전후 안전보장을 쟁취해낸 대통령, 그 위대한 업적을 우리는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국대통령의 기념관 하나 번뜻한 것이 없습니다.

‘功七過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박사에게도 많은 과오가 있었습니다. 過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功이 過를 덮고도 남으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박사의 업적이, 그 공로가 재조명되고 바르게 평가되어서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서없는 말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우남 이승만 박사|작성자 성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