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래하는 은행에 들렀더니 부지점장이 눈인사를 하며 노란 서류봉투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안철수의 생각>이었다. “그 책 어디서 구했소? 요앞 서점에 있습디까?” “아니요. 은행에서 모 경로를 통해 특별 주문했습니다. 은행 직원들과 돌려볼까 합니다.” “음, 서점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데요. 나도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 “그러시다면 먼저 읽어보십시오. 저는 나중에 읽지요.” “오, 그럼 고맙지요.” 책이므로 사양하지 않았다.뜻밖의 횡재다. 고객관리 차원일까? 그런 거 같진 않았다. 은행 부지점장은 평시에도 선한 눈빛에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또는 책을 향한 내 눈빛이 과도하게 절실했을 수도 있고. 하여간 안철수 교수의 책을 들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안 교수 책은 거의 늘 재미가 없었지만 이번 책만큼은 현재진행형인 사회적, 정치적 파장의 진원지인 듯하므로 꼭 읽어보기로 했었다.

책 표지는 어디서 본 듯하다. 어떤 책이었더라. 흰색 바탕에 검은 활자와 흑백 사진,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유사한 이미지의 표지다. 깔끔하고 괜찮은 표지 디자인이다. 표지를 펼치고 목차를 훑어보고 머리말을 읽는다. 이런 류의 책은 머리말에 책의 개요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머리말 중 한 꼭지를 옮긴다.
“살아오면서 진로에 대한 선택이 필요할 때마다 비교적 짧고 깊은 고민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지만 정치참여 문제는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결정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내 삶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 문제는 국가 사회에 대해 너무나 엄중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기대를 거는 분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내가 가진 생각이 그분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 내가 그럴 만한 최소한의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6쪽-
안 교수가 이 책을 쓴 이유에 관한 답이 될 만한 구절이다. 내 책 읽는 스타일대로 스킵과 집중을 스피디하게 반복하며 각론으로 들어가서 안 교수가 바라는 국가, 사회에 대한 안 교수의 생각을 들어본다.
“우리는 지난 50여 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습니다. 처음 25년은 이른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했고, 후반 25년은 자유에 대한 갈구를 토대로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죠. 그 결과 선진국들이 200년에 걸쳐 이룬 일을 우리는 50년 만에 해내는 커다란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할까요? 저는 불안감 해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주거, 보육, 교육, 건강, 노후 등 민생의 기본적인 영역에서 광범위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되는 중산층도 가족 중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한순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형편이고요. 자녀들 교육시키다 보면 노후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죠. 어렵게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이자 갚느라 쩔쩔 매는 집들도 많죠. 개인들이 각자 불안하다 보니 자기만 생각하는,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 미덕인 사회공동체 의식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어요. 정부가 국민의 불안을 해결해주지 못하니 각자 살기 위한 방편에 몰두한 결과겠지요.
이제 이 문제를 개개인의 경쟁력이나 책임에만 맡기지 말고 국가가 기본적인 안전망을 제공해서 불안을 해소해줄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또 시장에서의 경쟁에는 공정한 기회와 규칙이 보장돼야 하고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정의로운 복지국가’ 혹은 ‘공정한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복지와 정의는 평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으니, 남북의 통일을 추구하면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제도 절실합니다. 결국 복지, 정의 평화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원으로 이런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를 달성하려면 많은 국민들의 동의와 합의가 필요할 거예요. 소통을 위한 공감대를 만들어야 하고요. 현재의 정치권은 진영논리에 빠져서 상대의 의견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데,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통해서 복지, 정의, 평화의 시대적 과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1~83쪽-
위 칼럼이 안 교수가 지향하는 국정 3대 목표인 ‘복지, 정의, 평화’ 각론에 대한 큰 줄거리 격이다. 다음은 안 교수가 지향하는 3대 목표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슈이지만(분류하자면 정의 항목에 해당되는), 안 교수의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재벌 개혁‘에 대한 안 교수의 생각을 읽어보자.
“우리나라 재벌들은 물론 자신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국가적으로 많은 자원을 몰아주고, 노동자들이 희생했기 때문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죠. 가난한 집에서 맏이만 대학에 보내는 것처럼 다른 가족의 희생 위에서 출세한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재벌들은 모든 걸 제 스스로 이룬 것처럼 행동하면서 이익을 독식하고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았죠.
특히 노동자, 협력기업 등 기업 이해관계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편법상속, 내부거래 등으로 기업의 이익과 재산을 빼돌리는 일도 많지 않았습니까? 대주주나 그 자녀가 적은 종잣돈으로 회사를 만든 다음 계열사들의 ‘일감 몰아주기’로 급성장시켜서 재산과 경영권을 편법상속하는 일도 흔했고요. 이 과정에서 경쟁 중소기업들이 억울하게 도산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또 재벌계열의 유통 대기업들이 기업형 수퍼마켓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골목상점,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었습니까? 기업의 이익은 늘어도 비정규직 고용을 더욱 늘리는 등 노동자에겐 인색했고요.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무마하기 위해서 정치권과 법조계, 언론 등에 부적절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미쳤고, 이것이 우리사회의 부패를 심화시키는 한 원인이 됐죠.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그동안 재벌기업들이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면서도 온전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19쪽-
재벌 개혁에 관한 안 교수의 의견은 민주통합당의 당론과 흡사하다. 아울러 한국에서의 그의 정치적 포지션은 좌파임이 명확하다는 걸 인식하는 데 충분한 내용이다. 안 교수가 말하는 안 교수 개인의 ‘인생에서 성공의 정의’를 들어보자.
“제 인생에서 성공의 정의는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영어로 ‘make a difference(차이를 만드는 것)’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죽고 난 후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긍정적인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름 석 자를 역사에 남기고 싶은 욕심은 없어요. 그저 크로마뇽인의 벽화처럼, 누구인지도 잘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거나 좋은 제도, 좋은 책, 바람직한 조직 등을 통해 세상에 흔적이 남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내 삶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내가 꿈꾸는 성공의 모습입니다.”
-257~258쪽-
안 교수의 인생의 성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매우 아름다우며 나 역시 존경하는 동양의 성인의 가르침과 거의 일치한다. 안 교수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요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기존의 부패하고 무능력한 정치권이 달성하지 못했던 바람직한 사회, 즉 정의롭고 평화롭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의 목표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치적 목표인 듯하다. 한국이 그가 말하는, 또는 바라는 사회가 된다면 지금현재의 한국보다 확실히 더 살기 좋고 발전된 사회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을 모두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안 교수는 진정으로, 진심으로 한국과 한국인이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책을 모두 읽고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희망대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한국이 그가 바라는 낙원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모든 돈을 모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거나, 모든 사람의 모든 재능을 모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일까? “우리 모두 행복해집시다”라고 여러 번 외치면 모두 행복해지는 것일까?
안 교수의 선의는 이해되지만 안 교수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한국호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동안 (안 교수 말처럼 구태의연하고 부패한) 여야 정치권에서조차 누차 언급되던 문제점들과 그들 나름대로 제시하던 해결책들의 모둠 짜깁기인 듯 보인다. 한참을 더 양보하더라도 재해석 정도의 수준으로 보인다. 안 교수가 이 책에서 제안한 해결책 중 안 교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자신이 10여년 몸담고 일하여 실상을 이해하는 중소기업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 그렇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중소기업 CEO 수준이거나 중소기업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중소기업 CEO출신 교수로 보인다.
“우선 국가 경제 차원에서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은 경제의 ‘포트폴리오’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식을 분산투자해야 안전한 것처럼 국가경제도 대기업에만 의존하면 특정한 위험에 취약할 수 있죠. 대기업과 함께 탄탄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들이 육성된다면 이 두 축이 국가경제와의 리스크를 낮추고 안정성을 높여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요하죠. 대기업의 일자리 창출은 이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1977년 외환위기 이후에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더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는 줄었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고 최대한 고용의 효율을 갖춰야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 고용은 20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고요. 5천만 국민 중 대기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200만 명밖에 없고 대기업 임직원과 공무원 등을 제외한 나머지 2000만 명 이상의 일자리는 전부 중소기업 또는 벤처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세 번째로는 중소기업이 잘 발전하고 혁신해야 대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파트너들은 대기업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제공해주고 그래서 대기업 자체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됩니다. 구글 같은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대표적인 예인데요, 구글 때문에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벤처기업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구글의 우산 아래에서 자라면서 새로운 가치나 창조적인 아이디어들을 구글에 제공하죠. 그러니까 구글 자체가 아무리 혁신능력이 떨어져도 새로운 업체들로부터 아이디어를 공급받는 길이 열려 있으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중소기업, 벤처기업을 키우는 것은 대기업을 위해서도,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126~128쪽-
이 책을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안 교수 말로 바꿔 말하자면 비교적 창의적인 발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안 교수의 어린시절 성장과정, 학업과 사업 과정의 역경돌파 에피소드들과 개인적 인생관 등에 더하여 정치가로서의 국가경영의 포부와 한국사회에 대한 희망사항 등이 책 속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흩어져있다. 이 책에서 가장 뜻밖이었던 점은 안 교수가 겸손한 척하면서도 자신의 업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만년 전에 천제 환인의 아들이신 신인(神人) 환웅께서 구름과 비와 바람을 몰고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시니..” 이 책을 다 읽고선 뜬금없이 떠오른 고조선 건국신화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은 될 수 있는 대로 사지 말고 빌려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로선 꽤 실망스러웠던 기존 출간된 안 교수의 다른 책들과 책 내용의 질과 깊이에 별 차이가 없다. 불과 4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은 대선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읽지 않았을, 더 정확히는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 책이다. 급조한, 또는 일천한 안 교수의 세계관과 국가관, 설익은 인생관이 나열된 평범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살 생각이 전혀 없다. 안 교수의 책에 여러 번 실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