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를 보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들이 풀려난지 어제로 70주년이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히스토리 채널에서 광고도 없이 줄창 틀어 주더라구요.

원래 괴기물이나 공포물, 잔혹하거나 불편한 영화를 잘 안 보기 때문에
예전에도 한번 중간에 꺼 버린 적이 있는데 어젠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어릴때 영화를 보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그랬듯이,
다 꾸며낸 거라고,

작가가 지어 내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봤지만 이 영화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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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indler’s list – Main theme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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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Holocaust)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이처럼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대량 학살이 그로써 마지막이 아니었고,
한 생존자가 말했듯이 언젠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결국 도망쳐 나올 현실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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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게서 狂氣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는 보편적으로 광기가 지배한다.
In individuals, insanity is rare; but in groups, parties, nations and epochs, it is the rule.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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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촬영이 대부분이었던 1993년도에 이 영화는 드물게 흑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잿빛 게토 거리를 배경으로 어린 소녀의 빨간 코트가 더욱 선명하게 눈길을 끕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유태계 미국인인 스필버그 감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게 있어서 색은 생명을 나타내는데 홀로코스트는 빛이 없는 암흑이었다.
흑백으로 찍은 것은 그 때문이다.

빨간 코트만 색을 넣어 돋보이게 한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유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흑백의 풍경 속을 걸어 가는 아이의 빨간 코트처럼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독일의 철로를 폭파한다든지 해서

이 비극을 최소한 늦추거나 멈출 수 있었지만 그들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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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쉰들러로 하여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도,
전재산을 뇌물로 바쳐 유태인 천여명을 구해낼 계획을 세우게 한 것도,
총성 울리는 거리를 정처없이 걷는 빨간 코트의 소녀를 보고 나서였지요.

화장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치솟고

시신 태운 재는 눈발처럼 흩날려 거리를 덮는데,
리어카에 실려가는 조그만 주검을 빨간 코트로 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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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 소녀역을 맡은 아역 배우 Oliwia Dąbrowska는 촬영 당시 3살이었습니다.
감독 스필버그는 그녀에게 18살이 되기까지는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열한살이 되었을때 영화를 처음 보고 공포에 질렸고,
성인이 되어서 다시 보았을땐 자기가 맡은 역할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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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당시 66세의 Roma Ligocka 씨- 출판 기념 싸인회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쉰들러나 수용소장 괴트가 실존 인물과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빨간 코트의 소녀 역시 실제 인물로 밝혀졌습니다.
단,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달리 살아 남아서

무대와 코스튬 디자이너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영화를 본 Roma Ligocka 씨는

독일 치하의 폴란드 Kraków 게토 거리를 헤매던 빨간 코트 소녀가 자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The Girl in the Red Coat: A Memoir”란 제목으로 회고록을 썼다고 합니다.

-Kanada Komm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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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희생자들의 소지품과 귀중품들을

분류해서 독일로 보내는 작업을 맡던 수감자들을 ‘카나다 특공대’라 했고,

Kanada Kommando (Kanada는 Canada의 독일어 표기)
물류 창고가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Canada‘로 통했다고 합니다.

캐나다가 당시 아우슈비츠 수감자들 사이에선 ‘풍요’의 대명사였으며,

이 곳에 배정된 사람들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대우도 좋았다니 아이러니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