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1.12.24 00:30 / 수정 2011.12.24 00:30
5년 전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때로 기억한다. 도쿄 외곽 조후(調布)시의 나지막한 2층 집 문간방에서 봤던 역사적 광경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
박태준과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당시 80세와 95세. 세지마의 병세가 심각하단 이야기를 듣고 박 전 포스코 명예회장이 세지마의 집을 찾았다. 기자는 박 전 명예회장의 양해를 얻어 포스코 직원을 가장,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박태준이 방으로 들어서자 휠체어에 앉은 세지마가 엉덩이를 조금 들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섰다. 몸속에 남은 생의 에너지를 모두 쥐어짜는 듯했다. 그러더니 팔을 올려 절도 있게 경례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박태준도 발끝을 모아 깍듯한 경례로 응대했다.
거기엔 희로애락의 역사가 압축돼 있었다. 한·일 양국의 대립과 갈등을 막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두 사람의 우정과 존경,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 역사적 순간을 담고자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똑딱이 카메라’는 두 사람이 손을 내린 3초 만에 플래시를 터뜨렸다. 안타깝게도 역사를 남기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지마 선생은 평생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어. 그걸 자주 표현했고….”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당시 일왕의 과거사 반성 표현 수위를 두고 일 외무성은 ‘유감이다’란 기존 표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어. 그러자 세지마가 외무성이 눈치채지 못하게 양국을 오갔지. 결국 그의 막후조정으로 ‘통석의 염을 금할 길 없다’란 진일보한 표현이 나온 거야.”
한국을 사랑했던 세지마를 늘 칭송했던 박태준. 그도 13일 세상을 떠났다. 결코 티 내지 않고 두 나라 가교 역할을 했던, 그걸 ‘사명’으로 여겼던 두 사람이 갔다. 재산 한 푼 안 남긴 것 또한 빼닮았다.
“위안부 (평화)비를 조속히 철거하라.”(노다 일본 총리), “성의 있는 조치 없으면 제2, 제3의 평화비가 세워질 수 있다.”(이명박 대통령)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간 18일 한·일 정상회담 장면은 기억하는 한 최근 10년 사이 가장 격렬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서로 말은 골라서 했다. 양국 정부 관계자는 서로 “한국(일본)의 한계”라며 상대방 탓을 한다.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해 내는 것이야말로 외교의 미학이다. 박태준과 세지마는 그걸 해냈다. 그래서 평가를 받는 게다. 두 사람의 마지막 경례에는 그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