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매미을 잡아오는 사람은 수박을 그저먹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동전 3푼을 내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저 매미을 잡아오 도록하거라.

보월 스님에게 물으니 아무 말을 하지도 아니하고 주머니 속에서 동전 3푼을 끄지버내어서 만공 스님에게 드렸다.

현현한 곡이다.

눈을 감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읍니다.

눈을 떠보아라 너의 옛집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읍니다. 멀리에 있는데요.

그럼 눈을 감아라. 너의 옛집을 생각하거라 어머니가 너을 부르는 소리을 생각하거라 그럼 옛집이 보니느내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느냐.

 

경허(鏡虛)의 제자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 불교계를 지킨 이가 만공(滿空1871∼1946)스님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속세의 성이 경허스님과 같이 송(宋)씨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았으니 경허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揭)를 받고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하루는 함께 가던 중이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쫒아오는 바람에 힘껏 내달아 산을 올랐다.  나중에 그 중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질책하자 『그게 다 자네 때문일세. 그 바람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하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일화는 스승인 경허의 이야기라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에 어느 스님의 일화라도 무방할 것이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에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조선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 하자, 총독부 정책에 순응적이던 다른 주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또하나의 일화이다. 만공이 어떤 사미승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만공스님은 여기에서 꽉 막히고 말았다. 그 이후 이 화두를 들고 공부에 박차를 가했으며, 의심덩어리가 독로(獨露)하여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空)이 없어지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정진하여 새벽녘이 되자 어둠을 가르며 둥 둥둥 하고새벽 쇠종소리가 울려왔다. 이 순간 미망(迷妄)의 경계가 벗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그 쇠종소리에 어두웠던 눈앞이 환히 열렸으며, 그 종소리가 혜안을 밝혀준 것이었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만공은 거울 앞에 서서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의 자취가 어려있는 정혜사까지는 모두 1,200계단으로 된 오름길이 있는데 이 곳에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미륵상과 만공의 사리탑을 볼 수 가 있다.  성스러움과 더러움의 오르내리며 도를 깨우친 그를 떠올려 보며 부끄러운 얼룩이 많은 나를 위로해 본다.

수덕사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