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rce: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23/2011122301570.html

베네통은 왜 추억의 브랜드로 전락했나?
초스피드 유행 시대… 베네통, 계절별 상품 고집하다 외면 당해

프랭탕(Printemps) 백화점 본점이 있는 프랑스 파리의 오스만 거리(Boulevard Haussmann). 한국의 명동처럼 의류 매장이 밀집해 있는 파리의 대표적인 쇼핑 거리다. 지난달 15일 오후 7시쯤 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자라(ZARA) 매장을 나서던 한 20대 여성은 “베네통(Benetton)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It’s old, not trendy.”(너무 오래되고 유행에 뒤처져 있다.) 옆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40대 후반인 나에게도 클래식(classic)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30m 정도 떨어진 베네통 매장과 달리, ZARA 매장 출입문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쇼핑객들로 닫혀 있을 틈이 없었다.

‘머스트 해브(Must-Have)가 해즈 빈(Has-Been)이 됐다.’ 올해 3월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의류 브랜드 베네통의 추락을 이렇게 표현했다. 베네통 옷 한벌 없으면 유행에 뒤처진 취급을 받을 정도로 ‘반드시 가져야 할’ 브랜드였지만, 이제는 ‘한때 가지고 있었던’ 추억의 옷이 돼버렸다는 의미였다.

베네통은 2000년 이후 지난해까지 연평균 2%도 채 성장하지 못했다. 20억1800만유로이던 2000년 매출은 지난해 20억5300만유로에 그쳤고, 순이익은 2000년(2억4300만유로)보다 오히려 줄었다(1억200만유로). 경쟁업체와 비교하면 더 초라하다. 같은 기간 H&M은 매출이 4배(150억달러), ZARA는 6배(175억달러) 늘었다. 2007년 위기의 패션브랜드 베네통은 창업자의 아들 알레산드로 베네통(Alessandro Benetton·47)을 구원투수로 선택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길을 걸어왔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전략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변화의 흐름에 뒤처졌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넘쳐 장수(長壽)를 바란 나머지 보수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고비용 비즈니스 모델을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

회장인 아버지(루치아노 베네통·76)가 있지만, 그는 부회장을 맡아 사실상 경영 최전선에서 베네통을 이끌고 있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멀리 보고 가겠다.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소비자의 기호가 갈수록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베네통은 패션에 대한 베네통만의 철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고품질의 옷을 가장 접근 가능한 가격(accessible price)에 만드는 회사이다. 옷의 품질은 양보할 수 없다.”

충격적인 소재를 활용한 광고와 밝고 다채로운 색의 옷으로 소비자를 매료시켰던 ‘색깔의 왕국’ 베네통은 부활할 수 있을까? 지난달 16일 파리 오스만 거리에 있는 베네통 플래그 숍(flag shop)에서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을 Weekly BIZ가 만났다.

“기업은 사람과 같아서, 저마다 DNA를 가지고 있다. 50여년 동안 쌓은 브랜드 명성과 우리가 가진 지금의 모습, DNA를 기반으로 재출발하겠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새하얀 와이셔츠 위에 하늘색 니트를 입고 나타났다. 물론 베네통이 만든 옷이었다. 그는 “패션(fashion)이란 그날의 기분이 어떤지 보여주는 신호”라고 했다. “녹색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다. 회색 옷을 입었을 때보다는 마음이 가뿐해 보이고 감정 상태가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나?” 컬러풀한 옷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색이 바랜 기업의 경영자라고 하기엔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부진했던 이유는?
성공에 안주, 트렌드 변화에 둔감… 발 빠른 ZARA·H&M에 밀려
공장 이전 늦어 비용절감 못하고 다른 사업 손대 집중력 떨어져

 

▲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오똑한 콧날이 아버지를 꼭 닮은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미국 보스턴대(이학 학사), 하버드대(경영학 석사)에서 공부했다. 벤처캐피탈 회사를 창업해 경영자로서 경험도 지녔다. “가족은 베네통이 더 세련된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기업 구조를 바꾸고 싶어한다. 그래서 전문적인 경영 교육과 독립된 기업인으로서 성공 경험을 가진 나를 택한 것이다.” / 베네통 제공

컬러 옷의 시대를 열다

베네통은 1955년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을 포함한 4남매가 집에서 스웨터를 만들어 팔면서 시작됐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에선 전통적인 사회 구조가 해체되고 재건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이 싹트고 있었다. 1953~63년 다른 유럽 국가보다 2배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이탈리아에서도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고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여가와 스포츠, 패션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 있었다.

베네통은 이런 변화에 일찍 눈을 떴다. 무채색 일변도이던 옷 색상에서 탈피해 화려하고 산뜻한 색의 스웨터를 내놨다. 창업자인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은 자서전에서 ‘손님들은 마치 색채에 굶주렸던 것처럼, 그리고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생동감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앞다퉈 알록달록한 우리 스웨터를 사갔다’고 회상했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우리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ZARA나 H&M은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베네통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알고 있다. 패션 업계에서 120개국에 진출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합리적인 가격의 고품질 제품을 만든다는 평판을 50년 넘게 쌓아왔다. ‘컬러’라는 유산을 가진 니트웨어(knitwear)의 1인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1980년대 초 연평균 30%의 성장률을 기록한 베네통은 패션 산업을 혁신하고 광고의 첨단을 달리던 기업이었다. ‘후염(後染) 가공’은 기존 의류 생산 공정을 혁신한 베네통의 대표 기술로 꼽힌다. ‘털실 염색 후 손이나 기계로 제작’하던 기존 스웨터 제조 공정을 ‘제작 후 주문이 들어오면 염색’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유행하는 색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후염은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선호에 신속히 반응할 수 있고 불필요한 재고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수십년 동안 소비자와 사회의식, 인류 공동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철학을 소비자와 공유하려고 노력해 온 신념이 베네통의 DNA”라고 말했다.

키스하는 신부와 수녀, 여러 색깔의 콘돔, 탯줄을 달고 있는 갓난아기 등 실험적이면서 보는 이에게 충격을 주는 소재들이 베네통 광고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기에 생명, 폭력과 평화, 인종주의, 종교 갈등 같은 진지함이 담겼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문영미 교수는 저서 ‘디퍼런트(Different)’에서 ‘베네통은 마케팅 역사상 주목할 만한 브랜드’ ‘전통적인 마케팅 개념을 뒤집은 1세대 브랜드’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30년 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환경 문제, 노동 여건, 종이 재활용 같은 사회적 이슈에 주목해 왔다. 지금은 기업과 사람 대부분이 따라 하고 있다. 그들에겐 이런 요소가 단지 마케팅 수단일 뿐이지 DNA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부활의 비전은?
고품질이면서도 합리적인 가격… 베네통만의 철학은 그대로 계승
의미 있는 광고로 소비자와 소통… 반응 속도 빠른 조직 만들어야

 

▲ 1991년 ‘천사와 악마’란 제목으로 나온 베네통 광고. 강렬한 흑백 대비가 인상적이다. / 베네통 제공

변화에 둔감했던 가족 경영

베네통은 지난달 새로운 사회캠페인 ‘언헤이트(UNHATE)’를 시작했다. ‘증오의 문화’와 결별하자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이집트 종교 지도자 아흐메드 알타예브 등 반목하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키스 장면이 담긴 합성 사진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베네통 부활에 도움이 될까.

“내일 당장 매출이 증가하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적인 브랜드 빌딩(brand building) 관점에서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베네통은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경영하는 가족 기업이다.”

그러나 가족 경영의 우직함이 우둔함으로 변질되면서 베네통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ZARA와 H&M 등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최신 트렌드를 주도하고 패션 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사이, 베네통은 기존의 계절별 기획 상품 생산을 고집하며 유행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베네통은 각국 매장 대부분을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한다. 매장별로 독립적인 운영과 책임 분담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직영 매장을 거느린 경쟁 업체들은 디자인―제조―물류―진열―판매에 이르기까지 본사가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중앙 집중 체제를 구축했다. 매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본사가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리드 타임(lead time·상품을 기획 생산 진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였다. 비용 절감을 위한 생산 공장 이전에서도 베네통은 한발 늦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지금은 새로운 아이디어만으로 경쟁력을 갖긴 어렵고 모든 경영 요소에서 발 빠르고 훌륭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120개국에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지만, 이것은 곧 이 나라들을 모두 관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개별 국가의 다양한 수요를 조화시키고 그것에 잘 반응하는 조직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베네통은 의류 부문의 실적 부진을 다른 사업에 뛰어들어 만회하려 했다. 1994년부터 고속도로 관리·운영, 고속도로 식당 운영 기업을 사들여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철도역사 및 공항 리모델링, 통신 부문 등 이탈리아 내 민영화 사업에도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했다. 성과가 없진 않았지만, 경영력이 분산되면서 의류 부문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은 “이 회사에 훌륭한 경영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이 부회장으로서 내 목표”라고 말했다. 아버지 세대의 기업 조직과 경영 방식을 현대화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2년 동안 기업 재조직화 플랜을 진행했다. 원재료 비용 재협상을 진행하는 등 비용을 총 1억2200만달러 줄이는 데 성공했다. 세르비아에 있는 직물 공장에도 6000만달러를 새로 투자했다. 생산 비용을 줄이고 생산 라인에서 시장까지 상품을 내놓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베네통이 이뤄온 성공의 자산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싶다. 같은 책의 새 챕터를 쓰는 것처럼.” 아버지와 다른 아들이 들고 올 성적표를 패션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